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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재미

(음악) Getz & Gilberto, 인간은 정말 발전하고 있을까

앨범을 하나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저는 음악에 문외한에 가깝지만, 단지 20년 가까운 열정적인 리스너의 자격으로 제가 접했던 좋은 것을 권해드리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좋은 음악들이 있지만 어디선가 소개할 기회가 있다면 가장 먼저 이 앨범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희한하게 좋은 앨범은 커버 디자인도 좋습니다.

 

이 앨범은 미국의 색소폰 연주가 Stan Getz(스탄 게츠)와 브라질의 기타 연주자 João Gilberto(호아오 질베르토 또는 주앙 질베르투)가 협업해서 만들어낸 보사노바 앨범입니다. 앨범명은 두 사람 이름 그대로

 

Getz & Gilberto (게츠 앤 질베르토)

 

하지만 작곡과 피아노를 맡은 '보사노바의 창조자' Antônio Carlos Jobim(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빔)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왼쪽부터 질베르토, 조빔, 게츠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을 의미하는 '보사노바(Bossa Nova)'는 브라질 삼바 리듬과 미국의 웨스트코스트 재즈가 결합해 탄생한 장르입니다. 보사노바라고 하는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은 50년대 후반에 등장한 것으로 보는데, 흥미로운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 영화계에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라는 사조가 있었습니다. 트뤼포, 고다르 같은 젊은 작가들이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들면서 만들어진 흐름이었죠.

 

그런데 프랑스어로 '누벨바그'도 '새로운 흐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멀리 떨어진 유럽과 미주 대륙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젊은이들이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새로운 시대'를 천명했다는 사실이 멋지지 않나요?

 

프랑수아 트뤼포 <줄앤짐>

 

다시 앨범으로 돌아와서, 앨범은 주로 질베르토의 기타와 목소리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질베르토는 나른하게 읊조리다 못해 속삭이듯 노래하고, 기타는 요란하지 않게 리듬을 밀고 당깁니다. 게츠의 색소폰은 부드러운 가운데 절제하고, 조빔의 피아노는 자세히 들을 때 더 아름다운 마리아쥬를 완성합니다. 좋은 디자인은 더 보탤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라는 정의에 동의합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곡인 'The Girl from Ipanema'. 질베르토 부부가 불렀습니다.

 

앨범은 총 8곡, 33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을 갖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내용과 형태가 부합하는 구성이라고 봅니다.

 

1. The Girl from Ipanema

2. Doralice

3. Para Machuchar Meu Coracao

4. Desafinado

5. Corcovado

6. So Danco Samba

7. O Grander Amor

8. Vivo Sonhando

 

<Girl from Ipanema>와 <Corcovado>에 나오는 여성 보컬은 João Gilberto의 아내인 Astrud Gilberto(아스트루드 질베르토)입니다. 남편 질베르토가 영어가 익숙지 않아 아내에게 부탁했는데, 신비한 음색과 독특한 발음이 더해져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번에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이국의 해변을 느끼게 합니다.

 

곡명인 Corcovado는 꼭대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커다란 예수상이 서있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산 이름인데, 산 정상에서 이파네마 해변이 내려다 보입니다. 이 두 곡의 당연한 귀결로, 아스트루드는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Corcovado, "Quiet nights of quiet stars, Quiet chords from my guitar"

 

이 앨범은 '보사노바'라는 장르 자체를 규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앨범을 통해 보사노바가 전세계에 알려졌고, 이후에 탄생한 수많은 보사노바의 원류를 좇다보면 그 끝엔 결국 이 앨범이 있습니다.

 

당시 그래미를 석권했다는 사실을 거론하는 것이 공연하다는 느낌을 주는 건, 이 앨범이 상업성이나 평론의 잣대를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가치에 닿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라질 채권으로 큰 손해를 본 사람도 이 앨범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실제 앨범의 5번 트랙 <Desafinado>는 다른 곡과 마찬가지로 감미로운 목소리 때문에 흡사 연인에게 부르는 사랑 노래처럼 들리지만, 알고보면 당시 보사노바를 혹평한 평론가들을 향한 나름 신랄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평론가 양반, 음정이 좀 나가고말고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제가 이 앨범을 접한 건 2007년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듣고 어찌나 좋던지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도 다시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에 빨리 혼자 있는 시간이 오길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그런 때가 있었네요.

 

더 놀라웠던 건 이 앨범이 무려 1964년 발매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 프랑스에서는 신구(新久)논쟁이 있었습니다. 한편에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반대로 인류는 이미 그리스·로마시대에 정점을 찍었고 이후에는 그것들의 반복과 변형에 그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간의 논쟁이었습니다.

 

저는 Getz/Gilberto를 접하고나서 '역시 후자가 맞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이런 마스터피스를 불과 이틀만에 녹음했다니요..

 

지난해 세상을 떠난 호아오 질베르토

 

요즘 같은 봄밤이나 아직 추워지기 전인 가을밤, 와인 한잔에 곁들이는 보사노바는 듣는 이를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꿈결같은 이국으로 인도합니다. 와인에 취하는 걸까요, 음악에 취하는 걸까요? 역시 후자가 맞는 거겠죠?

 

일청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