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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재미

(책)「아무튼, 메모」를 읽다가

 

몇 년 전 나는 그때의 모든 감정을 담아낼 만한 시를 발견했다. 그 시는 내게 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던 순간의 충동들을 떠오르게 했다. 당시에 나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왜 막연히 괴로운지, 내가 되고 싶은 게 대체 무엇인지, 삶을 향한 내 사랑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그 시의 일부분은 이렇다.

 

당신 꿈의 한가운데 있는 근심

그 근심의 한가운데로부터

당신을 지켜줄 한마디 말을 주고 싶어요

[...]

나는 당신만이 잠시 깃들여 지내는

공기가 되고 싶어요

남들 모르게 꼭 필요한 공기가

 

내 사랑하는 남자는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 적막하다고 느낄 때

사방이 막혀 있다고 느낄 때

내 좁은 마음에 커다란 우주를 달라고 빌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랑하게 되니 그에게 우주가 생겼다.

 

_마거릿 애트우드, 「잠의 변주」

 

(pp. 28~29)

 

 

나는 왜 메모주의자가 되었나.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그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pp.35~36)

 

 

그다음 페이지에는 책에서 읽은 좋은 생각들을 대략적으로 써놓았다. '오늘의 문장' 같은 것이었다. [...] 오늘의 문장은 밑에 여백을 남겨놓고 썼다.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여백에 계속 내 나름의 각주를 달았다. 그러다 여백이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 오늘의 문장은 왼쪽 페이지에만 쓰고 오른쪽 페이지는 아예 비워두게 되었다. 그 오른쪽 빈 공간에 생각날 때마다 생각을 덧붙이고 덧붙였다. [...]

 

그러나 내가 왼편에 얼마나 멋진 문장들을 옮겨썼든 나의 삶은 오른쪽 페이지에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 엉성한 생각들은 좀 더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다가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쓰이지 않은 페이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내 메모장의 여백이 내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 같았다. 먼 훗날 나는 보르헤스가 이것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pp. 36~39)

 

왼쪽 페이지에 이렇게 적고는 오른쪽 페이지를 여백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근사한 책입니다. 세상에 부족한 말들을 담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균형을 맞추고 있는 책입니다.

 

가끔 이런 책을 만나죠. 잘 읽히지만. 잘 읽어내려갈 수 없는 책. 숨죽이고 걷다가 자꾸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책. 

 

이 책(들)은 편집숍을 겸하고 있는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Don't die before trying(죽기 전에 꼭 드셔보쇼)"라는 호기로운 슬로건을 내건 한남동의 어느 카페에 갔을 때, 사실 '죽어도 여한이 없달 만큼' 커피가 맛좋았다면 숍인숍의 서가에까지 눈이 가닿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행운(?)으로 저는 이 책을, 이 시리즈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무튼, 메모」라는 책은 "아무튼" 시리즈 중 한권인데, 다른 시리즈는 「아무튼, 망원동」, 「아무튼, 비건」, 「아무튼, 기타」,「아무튼, 외국어」, 「아무튼, 술」같은 식입니다.

 

"생각만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가지가 있나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시리즈라고 합니다. 고맙게. 무엇 하나에 사로잡힌, 그것을 무진장 좋아하는 이가 한권의 책에서 그것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시종 이야기 하는 컨셉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요즘 뭐 좀 재밌는거 좀 없어?" 이 질문을 정말 자주 듣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속 이야기를 선뜻 꺼내놓지 않는 요새 사람들의 거의 유일한 감정표현처럼 들려서, 저는 자꾸 대답해주고 싶더라고요. '인생이 재미가 없네. 이 무료함에서 날 끄집어내 줄 뭔가가 필요한데 그게 뭔지 이제 나도 모르겠어. 정말 뭐 좀 없을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 시리즈는 그런 '꺼리'들을 잔뜩 제공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게요.

 

또 한가지 독특한 점은,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라는 세개 출판사가 협업해서 하나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협업 프로젝트라고 하네요. 기획도, 제목도, 북 디자인도, 읽어보니 내용도 확실히 눈길을 끕니다. 판형이나 분량도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나 범우사 시리즈처럼 핸디합니다.

 

 

위고×제철소×코난북스 "아무튼" 시리즈

[BY 위고출판사]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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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대학시절 손바닥만한 크기에 손가락 두마디 정도 되는 두께의 크라프트지로 된 메모장을 늘 들고 다녔습니다. 꽤 뚱뚱한 메모장이었는데, 1년쯤 지나자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찼습니다. 세상의 온갖 하잘것없는 것들을 끼적이느라 너덜너덜했죠. 그런데 영화를 찍든, 토론을 하든, 과제를 하든, 뭔가 아이디어를 내야하는 상황이 오면 저는 그 메모장부터 뒤졌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걸 찾았죠.

 

졸업을 한학기  앞두고 그런 '메모장이 하나 있는 나'와 '열개쯤 가진 나'는 얼마나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으로선 그런 시절이 다 있었나 싶을만큼 아득하지만ㅡ 당시에는 연출하는 사람이 되는게 꿈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꿈이었지만, 요행히 연출가가 되더라도 메모장이 '하나인 나'와 '열개인 나'는 연출가로서의 생명력에 큰 차이가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학교를 쉬고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결국 졸업을 앞두고 사회에 나갈 준비가 부족했다는 말을 돌려할 뿐이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때 메모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긴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책은 그때의 기억을 건져올려줘서 반갑고, 반가운 만큼 낯설기도 합니다. 아마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는 지기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과 서걱거림 같은 것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얼마나 괜찮은 책인가 하면, 저는 이제 고작 41페이지를 읽고 있으면서 이만큼의 추천하는 글을 적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못가서 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거거든요.

 

 

"메모같이 사소한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우리는 항상 사소한 것들의 도움 및 방해를 받고 있지 않냐고. 강아지가 꼬리만 흔들어도 웃을 수 있지 않냐고, 미세먼지만 심해도 우울하지 않냐고, 소음만 심해도 떠나고 싶지 않냐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몇 문장을 옮겨 적고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p.41)

 

 

 

'아무튼' 시리즈인 줄 알고 같이 산 책..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