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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물

생일 축하의 정규분포 (부모님께 받은 선물 : 떡케이크)

'생일 축하해' 요즘은 대개 온라인에서 축하나 선물을 갈음하지만, 그래도 여간 무딘 사람이 아니고는 주위 사람들의 호응도에 따라 '내가 그래도 잘 살았나보다' 생의 보람(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같은 걸 느끼기도 하고, 축하가 신통치 않으면 잠시거니 울적함(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비슷한 걸 경험하기도 하죠.

 

너 왜 나 축하 안했지?

 

올해는 제 생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마나한 말같지만, 저는 2월이 하루 길어지는 29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4년마다 한번 '진짜 생일'이 돌아와요.

 

본래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생일이 있는데, 올해로 그 규칙도 첫 예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도쿄 올림픽 안녕ㅡ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와 심지어 취소까지 예언(?)한 1988년 작품 <아키라>  ⓒ TMS Entertainment

 

태어난 날이 이렇다보니 제가 받는 축하의 표준편차는 꽤 큽니다.

 

(μ±1σ, 68.27%) 가장 흔하게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 이틀 중 하루를 택합니다.

 

축하를 하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생일은 아니고, 축하를 받긴 하지만 온전히 자격을 갖추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 축하를 건네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소 심드렁하기 십상입니다.

 

(μ±2σ, 27.2%) 대학 시절엔 보통 OT라고 부르는 개강 첫주 회식 자리를 어물쩍 축하 용도로 겸하곤 했어요.

 

본래 모이게 되어있던 날을 잡아서 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누군가 스윽- 생일 케이크를 들고 나타나는 식이죠. 왁자한 생일축하곡이 뒤따르고 노래가 끝나면 얼굴로 케이크를 먹고 있죠.

 

표준정규분포표  ⓒ incodom

 

(μ±3σ, 4.2%)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급한 친구들은 2월 28일에서 3월 1일로 넘어가는 찰나를 노리기도 합니다.

 

잊지않고 부지런 떠는 마음이 고맙지만, 이 친구들은 대개 부지런이 선물을 대체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μ±4σ, 0.2%) 축하의 분포도가 아무리 커져도 바뀌지 않는 건, 가장 빠른 축하는 언제나 부모님 몫이라는 점입니다.

 

옛날 분인 저의 부모님은 음력 생일을 챙기시는 간단한 방법으로 축하 행렬의 맨앞에 서시죠. 덕분에 저는 늘 생각지도 못한 부모님의 축하 전화로 생일이 다가왔음을 알게 됩니다.

 

올해 생일은 정말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 두런두런 식사 한끼 하고 싶었는데, 코로나19가 올림픽을 박살낸 기세로 우리가족 식사 계획까지 박살내 버렸습니다. 제 생일 축하가 대수겠냐만, 만남이 늘 기쁨인 우리 가족에게는 못내 아쉬운 생일이었습니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어느 목소리 지긋한 중년남성분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제 이름과 주소를 물으시기에, 무슨 일인지 용건을 여쭈었더니 '떡 케이크'를 배달하려고 하신다더군요.

 

주문한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전화를 잘못 하신 듯하다 말씀드렸더니, 중년의 목소리는 대뜸 만난 지 하세월인 사촌형의 이름을 댑니다.

 

희미하게 감이 잡힙니다.

 

형님이 보내셨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이건!

 

"주소지 확인 차 전화드렸습니다만, 부모님이 아드님 놀라게 해드리려고 주문하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확인 전화가 왔던 건 모른 척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나지 못하게 된 아들 생일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서 뭐라도 보내고 싶으셨고, 온라인이란 별세상에서 주문하기가 쉽지 않으셔서 궁리 끝에 막내이모 아들까지 동원하셨던 겁니다.

 

생일 아침,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반듯한 차림의 백발 남성분이 큰 상자를 안고 서계십니다. 노신사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상자를 제 품에 안겨주며 "축하드립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입니다.

 

크기도 큰 떡 케이크를 부려놓고, 인증샷도 찍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립니다. 까맣게 몰랐다고. 깜짝 놀랐다고.

 

'떡보의 하루' 떡케이크. 양이 어마어마해서 냉동실에 얼려 아직까지 꺼내먹고 있어요!

 

"생일인데 아무 것도 못해줘서 미안해 아들. 생일 축하해"

 

저에게 생일은 제가 감사해야 할 분들로부터 도리어 축하를 받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