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굵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몇이나 되는 친구를 만나셨나요? 사회생활 말고, 진짜 '친구'요.
이 글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김 팀장님'은 저희 협력회사의 업무책임자로, 저와 여러 해 일을 같이 해왔던, 더 정확히 말하면 저희 회사에 늘 큰 도움을 주셨던 분입니다.
저와 처음 업무를 시작할 때 김 팀장님은 컨설팅 회사의 팀장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김 '팀장님'이었겠죠. 그러다 본인과 함께 일하던 팀원 한분과 의기투합, 회사에서 독립해 자신들의 회사를 설립하셨어요.
언더커버 보스
저와 일을 하신 지 벌써 5년여의 시간이 흐른 것을 생각하면 당시 두 분은 20대 후반의 약관이었던 셈인데, 저보다 나이는 적지만 두 분 모두 성숙한 실력과 성품을 지니고 계셔서 뵐 때마다 정말 (표현을 양해해주신다면) 흐뭇하기도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김 팀장님은 새로운 회사의 대표/사장이 되었으면서도, 겸연쩍기도 할 뿐더러 이전과 다름없이 본인이 실무를 하면서 고객분들과 편하게 소통하고 싶다며 굳이 '팀장'으로 계속 불러주길 청했습니다.
그래서 제 호칭은 여태 '대표님'이나 '사장님'이 아니고 김 '팀장님'인 것입니다.
신은 존재한다
재작년에 제가 부서 이동을 하면서 김 팀장님과 저의 업무적인 인연은 멈추었습니다. 아쉬움이 컸지만, 업무가 끝났어도 관계는 계속됐습니다. 이전보다 빈도는 줄었지만 여전히 서로 안부를 묻고 가끔 만나 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김 팀장님은 적은 나이에 드물게 인품과 전문성을 두루 지니신 반면, 생의 무망한 재미나 유머감각과는 일찍 연을 끊으셔서, 신은 존재하며 알려진 바와 같이 공평하심을 역설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취밍아웃
어느 날, 김 팀장님이 "아직 부족한 실력이라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저에게 취미가 하나 생겼습니다"라며 취밍아웃을 하셨어요.
세상 진중한 김 팀장님에게 생긴 부끄러움은, 세상 근사한 '목공'이었습니다.
집에 탁상이 필요해서 주문한 원목을 직접 마감해 사용해 본 이후 목공의 세계에 발디디게 되었고, 나무를 다루는 순간에는 다른 복잡다단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생활에 유용하기까지 하다는 예찬이었습니다.
팀장님은 모처럼 갖게 된 취미에 제법 심취하신 모양으로, "목수로 본업을 바꿔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라며, 연신 신의 존재를 증명하셨습니다.
플레이팅 도마
그리던 어느 날 김 팀장님은 제게 무언가 하나 만들어주고 싶으니, 필요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달라는 감사한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갖고 싶어하기도 했거니와, 아직 경력이 오래지 않은 워너비 목수가 도전할만한 난이도라고 잘못 생각해서 '플레이팅 도마'를 부탁드렸어요.
그리고 얼마 뒤 이렇게 튼튼하고 매끈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작품을 선물받게 되었습니다. 호두나무 특유의 색과 결이 볼수록 자연스럽게 눈에 익고, 앞뒤면의 손잡는 부분을 서로 다르게 조형하셔서 사용할 사람을 세심하게 고려해 제작하신 줄 금세 알겠더군요. 그러고보면 선물은 그것을 준비한 사람을 닮기도 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속 깊은 김 팀장님은 본인이 제작하신 것 말고도 '아직 솜씨가 부족해서 선물하기 민망하고 마음에 안드실지 모른다'며 기성제품까지 함께 선물해주셨습니다.
마음씀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음(知音)
김 팀장님은 도마 제작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새기고 싶은 문구가 있는지 물으셨어요. 아내가 평소 좋아하는 '지음(知音)'이라는 문구를 새기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습니다. 검색해보니, 연주 소리를 듣고 연주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습니다.
음악을 하는 아내다운 제안이었고, 좋은 친구인 김 팀장님이 저희 부부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에서도 제격이었습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과 디저트에 재주있는 아내가 사는 집에서 도마는 이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근사하죠? :)
이건 도마가 아니다
언젠가 김 팀장님이 어느 경제학자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납니다.
경제학자가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길에 떨어진 지폐를 발견하고 줍자, 경제학자는 "그건 지폐가 아닐거야. 그게 정말 지폐였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줍지 않았을 리가 없어. 사람들이 줍지 않았으니까 그건 틀림없이 지폐가 아닐거야"
사물이나 행위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본질과 가치가 결정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김 팀장님에게 받은 것은 아마 도마가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도마였다면 받는 마음이 이렇게까지 기쁠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저렇게 반듯하고 매끄러운 만듦새가 아니었어도, 크기가 달라도, 호두나무가 아니고, 색이 달랐어도 받는 마음의 크기는 같았을테니, 이건 틀림없이 도마가, 도마만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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